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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는 날보다 못 쓰는 날을 기록하게 된 이유

by seunghee11 2026. 1. 28.

예전의 나는 글이 잘 써진 날만 기억하려 했다.
문장이 술술 나오고, 생각이 또렷하게 정리되고, 쓰고 나서도 만족이 남는 날들. 그런 날의 글은 저장했고, 다시 읽었고, 언젠가 다시 써먹을 수 있을 것처럼 아껴두었다. 이번 글은 잘 쓰는 날보다 못 쓰는 날을 기록하ㄴ게 된 이유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잘 쓰는 날보다 못 쓰는 날을 기록하게 된 이유
잘 쓰는 날보다 못 쓰는 날을 기록하게 된 이유

 

반대로 글이 잘 안 써진 날의 기록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쓰다 만 문장, 애매한 생각, 이유 없이 멈춘 글들은 지워버리거나 파일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었다. 잘 쓰지 못한 날은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공백이 느껴졌다.
기억 속에는 잘 쓴 날만 남아 있는데, 실제로 글을 쓰는 시간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간극이 커질수록 글쓰기는 점점 멀어졌다. 나는 현실의 나보다, 기록 속의 나에게 맞추려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잘 쓰는 날보다, 못 쓰는 날을 남겨보기로 했다.

1. 잘 쓴 기록은 나를 설명하지 못했다

잘 쓴 날의 글은 늘 깔끔했다. 생각의 흐름도 자연스러웠고, 문장도 정돈돼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글들만 모아두고 나니,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나 자신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글들은 결과만 남아 있었다.
과정은 지워져 있었고, 망설임이나 흔들림은 빠져 있었다. 마치 늘 준비된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제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반면 못 쓴 날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자, 훨씬 많은 것이 보였다. 왜 멈췄는지, 어떤 생각에서 막혔는지, 무엇이 부담이 됐는지가 그대로 남았다. 글의 완성도는 낮았지만, 상태는 훨씬 솔직했다.

이 기록들은 나를 설명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됐다.
어떤 날에 잘 안 써지는지, 어떤 조건에서 부담을 느끼는지, 무엇을 기대할 때 글이 굳는지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잘 쓴 글은 나의 능력을 보여줬지만, 못 쓴 글은 나의 리듬을 보여줬다. 글을 오래 쓰기 위해 필요한 건 능력보다 리듬이라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2. 못 쓴 날을 기록하자, 글쓰기의 공백이 줄어들었다

못 쓴 날을 기록하기 전까지, 글쓰기는 자주 끊겼다. 한 번 흐름이 깨지면 다시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시 시작할 때마다 잘 써야 한다는 부담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못 쓴 날의 기록은 이 부담을 낮춰줬다.
오늘도 잘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전제가 생기자, 글을 여는 행위 자체가 훨씬 가벼워졌다. 글쓰기의 기준이 결과에서 상태로 옮겨간 셈이다.

이 변화는 실제 행동에도 영향을 줬다. 예전에는 글이 안 써지는 날이면 아예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면, 지금은 그런 날에도 몇 줄의 기록은 남긴다. 그 기록은 글이라기보다 메모에 가깝지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날의 상태가 남아 있으면, 다음에 다시 글을 쓸 때 이어질 지점이 생긴다. 완전히 빈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못 쓴 날의 기록은 다음 글을 위한 발판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남긴 기록들 덕분에, 잘 쓰는 날은 오히려 더 자주 찾아왔다. 부담이 줄어드니 흐름이 오래 유지됐다.

3. 못 쓴 날의 기록은 글을 오래 쓰게 만드는 증거가 됐다

잘 쓴 날만 기록하던 시절에는, 글을 그만둘 가능성도 늘 함께 있었다. 잘 쓰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면, 기록할 게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글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못 쓴 날을 기록하기 시작한 뒤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글이 잘 안 써지는 날에도 남길 것이 생겼다. 그날의 답답함, 망설임, 포기한 이유까지 모두 기록의 일부가 됐다.

이 기록들은 나에게 중요한 신호가 됐다.
글이 잘 안 써지는 날이 있다는 건, 내가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완전히 떠났다면, 못 쓴 날조차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못 쓴 날의 기록을 실패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쓰고 있다는 흔적으로 본다. 그날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가 있다.

잘 쓴 날은 기억에 남지만, 못 쓴 날은 쌓인다. 그리고 글쓰기를 계속하게 만드는 힘은, 기억보다 쌓임에 가깝다는 걸 이제는 안다.

잘 쓰는 날보다 못 쓰는 날을 기록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그래야 글쓰기가 현실과 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잘 쓰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못 쓰는 날에도 남길 줄 아는 사람은, 오래 쓴다.

지금도 나는 잘 안 써지는 날의 기록을 남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기록이다. 그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남겨두는 것만으로도, 글쓰기는 계속 이어진다.

잘 쓰는 날보다 못 쓰는 날을 기록하게 된 건, 글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 덕분에, 나는 오늘도 글을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