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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나를 살린 게 아니라, 나를 돌아오게 했다

by seunghee11 2026. 1. 30.

예전에는 글이 나를 살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이번 글은 글이 마를 살린 게 아니라, 나를 돌아오게 한 과정을 적어보고자 한다.

글이 나를 살린 게 아니라, 나를 돌아오게 했다
글이 나를 살린 게 아니라, 나를 돌아오게 했다

 

글 덕분에 버텼고, 글 덕분에 견뎠고, 글이 있어서 무너지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그 말은 멋있었고, 설명하기도 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글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대신 내가 나에게 돌아올 수 있게 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자주 나에게서 멀어진다. 바쁘다는 이유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뒤로 미룬다. 그 상태가 오래 이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이 불편한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그때마다 글은 나를 붙잡아 주기보다는, 되돌아오게 만드는 신호에 가까웠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도망치지 않고 나를 마주하게 했기 때문이다.

1. 글은 해결해주지 않았지만, 외면하지 않게 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막연히 기대했다.
쓰다 보면 마음이 정리될 거라고, 답이 나올 거라고, 감정이 가라앉을 거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글은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글을 쓰고 나서도 문제는 그대로였고, 감정은 여전히 복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분명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게 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괜찮은 척’할 수 없었다. 애매한 감정은 문장이 되지 않았고, 이유 없는 불편함은 자꾸 멈춰 서게 만들었다.

글은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왜 이 부분에서 멈췄는지, 왜 이 문장은 쓰기 싫은지, 왜 이 이야기는 끝내지 못하는지. 그 질문들은 친절하지 않았지만,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시간은 종종 불편했다.
위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솔직해지는 시간이었다. 나를 낫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를 속이지는 못하게 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지금 돌아보면 글은 나를 살린 게 아니라, 나를 외면하지 못하게 만든 도구였다. 그리고 그게 내가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 시작한 첫 단계였다.

2. 쓰는 동안만큼은 나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던 시기의 나는 늘 바빴다.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처리해야 할 관계가 있었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바쁨 속에는 묘한 공허가 있었다. 하루를 꽉 채워 보냈는데도, 정작 나는 어디에도 없는 느낌이었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그 상태가 달라졌다.
몇 줄을 쓰든, 몇 분을 쓰든, 그 시간만큼은 나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기준이나 반응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바라봐야 했다.

그 과정은 늘 편하지 않았다.
쓰다 보면 괜히 눈물이 나기도 했고, 이유 없이 짜증이 올라오기도 했다. 어떤 날은 쓰고 나서 더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쓰게 됐다.

이유는 단순했다.
쓰는 동안만큼은 내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지내는 척하지 않아도 됐고, 괜찮은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됐다. 그냥 지금의 상태 그대로 존재할 수 있었다.

글쓰기는 나를 더 강하게 만들지 않았다.
대신 나를 있는 그대로 두는 법을 조금씩 익히게 했다. 그게 결국 나를 다시 돌아오게 만든 힘이었다.

3. 돌아올 수 있다는 감각이 삶을 버티게 했다

글이 나를 살리지 않았다는 말은, 글이 쓸모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글은 삶을 극적으로 바꾸지는 않았지만, 삶을 버틸 수 있는 감각을 만들어줬다.

힘든 시기가 와도 나는 안다.
완전히 길을 잃지는 않을 거라는 걸. 언젠가는 다시 몇 줄이라도 쓰게 될 거라는 걸. 그 몇 줄이 나를 다시 현재로 데려올 거라는 걸.

이 감각은 생각보다 크다.
삶이 흔들릴 때,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느낌. 그 장소가 화려하지 않아도, 정답을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곳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글을 대단하게 말하지 않는다.
치유의 도구라고도, 인생을 바꾼 무기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글은 내가 나에게 돌아올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길이었다고.

잘 쓰지 않아도 괜찮다.
자주 쓰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완전히 끊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글이 나를 살린 게 아니라, 나를 돌아오게 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오늘도 조용히 쓴다.
나를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